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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6/10/17(토)
남양은
서해안의 군사적 요충지로서
행정과 사법권을 부여받은 종3품의
도호부사가 부임하던 곳으로
체포된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처형되었다.
남양 고을에서의 순교자에 대한 처형은
참수형이나 군문효수형과
같은 공개 처형보다는
교수형과 같은 비공개
처형 방식을 사용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오늘날 옛 남양 고을의 명칭은
화성시 남양동이라는 동네 이름에만
남아 있지만
조선 후기 남양도호부는
오늘날 화성시의 비봉면까지를
포함한 서쪽 지역이 모두 관할 구역이었고
북쪽으로는 현재의 시화호에 접한 송산면부터
남쪽으로는 남양만까지 포함되었다.
남양 지역에
천주교 전교 과정을 확실하게 밝힌 문헌은
전혀 없는 실정이다.
그러나 여러 가지 간접적인 자료로
보아 남양 지역의 천주교 전래는
교회 초기부터 이뤄지고 있었다고 볼 수 있겠다《치명일기》와《병인순교자증언록》에 의하면, 지금까지 밝혀진 순교자로서
남양도호부 관내에서는
1867년과 1868년에 각각 1명과 3명 등
모두 4명의 남양 이웃 고을 신자들이
이곳으로 끌려와서
교수형을 당하여 순교한 것으로 나타난다.
1866년 11월 용인 고을에서 정 필립보를 체포하여 1867년 1월에 교수형을 집행했고, 1868년 7월 홍주 신리로부터 김 필립보, 박 마리아 부부와 수원 걸매리에서 김홍서 부부 등 모두 4명을 체포하여 이중에서 배교하여 석방된 김홍서의 부인 1명을 제외한 3명을 모두 교수형에 처한 것이 그 기록이다.
이외 남양 포교에게 체포되어 다른 지역에서 순교한 4명이 있다. 이 토마스(수원 옥에서 옥사), 이진오(죽산?), 이사성 요한(서울), 한 안드레아(서울에서 교수 당함) 등이다.
그러나 박해시대 이곳에서 순교한 신자들은, 주로 군진이 설정되어 사형을 집행했던 경기도 내의 수원(78명), 광주(38명), 죽산(22명) 유수부 등 다른 고을에 비하여 현격하게 적을 뿐 아니라, 박해와 직접 관련된 지방 관아의 어떠한 공식 문서도 남아 있지 않다는 점에서 남양도호부의 박해와 순교 실상이 어떠하였는지
의구심을 자아내게 하고 있다.
남양 고을에서의 순교자에 대한 처형은 참수형이나 군문효수형과 같은 공개 처형보다는 교수형과 같은 비공개 처형 방식을 사용했다는 것이 특징이다. 대원군의 지시에 충실한 안기영, 이용익 등의 도호부사가 관내의 각 면과 동리에 오가작통법을 강화하여 체포한 다수의 신자들을 비공식적으로 한꺼번에 죽이는 방식을 취한 것 같다. 그 결과 남양에서도 무명 순교자들이 생매장형으로 순교를 당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되었고 이는 구전으로 오늘날까지도 남아 전하게 되었다.
옥거리를 따라서 도작골로 향하여 남행하다가 정상 가까이 있는 당산을 지나서 다시 조금 아래로 내려가면 바로 건넝골에 도착하게 되니 이곳이 바로 생매장형이 집행되었던 곳이다.
현재의 성모 동산 원형 광장 자리에 해당된다.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와 직접적으로 관련된 기관은 천주교 신자가 남양도호부사 앞에 끌려와 심문을 받고 재판을 받던 동헌, 그리고 이러한 신자들을 체포하고 수색하던 토포청(討捕廳, 구한말에 토포청의 명칭이 변한 순교청, 별순교청)이다. 이밖에도 당시 향촌의 풍기를 관장하면서 고을 내에 척사적(=반천주교적) 여론을 형성하고 오가작통제를 직간접으로 감독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는 향청(鄕廳), 그리고 천주교 신자들을 가두어 두던 부옥(府獄) 등이 천주교 신자들에 대한 박해와 관련된 관아이다.
이러한 관아의 배치 구조나 위치에 대해서는 박해시대로부터 대략 30여년 정도 후대의 자료이기는 하나, 다음 가장 좋은 참고 자료가 된다. 아래 그림에서 동헌의 정 남쪽은 이층으로 된 삼문(三門)인 와룡루(臥龍樓)였는데, 남양 고을로 모든 신자들은 이 문을 통하여 동헌으로 들어가서 도호부사의 심문과 재판을 받아야 했다. 별순교청과 순교청은 모두 1894년 관제개혁 때 그 이전의 토포청이 바뀐 명칭이므로 실제로 토포청의 장소는 이동이 없었을 것이다.
(인터넷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