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안 이야기22] 무안 '일로장'의 역사(조선 초기~현재) -무안군동네작가 정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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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안 이야기22] 무안 '일로장'의 역사(조선초기~현재)를 정리했습니다.
*제작: 무안군동네작가 정기성
일로장의 역사
안녕하세요? 무안군 동네작가 정기성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최초의 장으로 알려져 있는 일로장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한국 최초의 장시(場市)가 열렸던 무안군 일로읍은 영산강 고대 포구문화권에 속합니다.
무안 지역은 호남의 젖줄인 영산강의 하류에 속해 있어 농사에 필요한 물과 교역에 필요한 물길이 확보되어 예부터 시장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전기에 나주와 무안 지방에서 최초로 시장이 개설되었는데, 일반적으로 '남창장'의 전통을 잇고 있는 무안의 일로장이 최초의 지방 장시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상권을 형성하던 무안 지역 시장은 일제강점기 목포가 개항하면서 더이상 성장하지 못했고 호남선이 지나는 일로시장을 중심으로 상권이 유지되었습니다. 현재 이곳은 쇠퇴가 진행되고 있는 여느 재래시장과는 달리 아직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데, 소전(가축시장)과 함께 이 지역 시장을 대표합니다.
규모가 컸던 남창장터에는 장날마다 인근의 각설이패들이 몰려들어 구경거리를 선사했으며, 일로장이 구장터로 이전한 이후로는 의산리에 소재한 ‘천사촌’에 거주하던 작은이패들이 일로장에서 동냥을 하면서 각설이타령을 불렀습니다. 당시 일로시장은 남도에서 제법 규모가 컸으므로 철로가 생기면서 각지의 각설이패들이 모여들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로장을 연상하면 각설이품바가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더욱이 고 김시라가 일로 천사촌을 배경으로 ‘품바’ 연극을 만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일로장은 각설이품바의 발상지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남창장은 조선시대 최초로 개설된 시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안에서 조선시대 최초의 시장이 개설된 것은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고재필에 의해서였습니다. 고재필은 1470년 큰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물품을 교환할 수 있는 시장 개설하였고, 이것이 조선시대 최초의 시장이 된 것입니다. 이때만 해도 오일장은 아니었고, 한 달에 한두 번 장이 열리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남창장이 오일장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편찬된 《동국문헌비고》(1770)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국문헌비고》 〈시적고〉의 향시(鄕市) 목록 중 전라도 무안현 조에는 당시 개설되었던 4곳의 정기시장이 장날 주기와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남창장은 매월 1일과 6일 장이 섰다.”고 되어 있어 1770년대에 오늘날과 같은 오일장이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94년에 남창장이 개설되었던 ‘안노(安老)’가 일로면[현재의 일로읍]으로 바뀌면서 남창장을 ‘일로장’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일로장은 일제강점기 일로역 후문에 개설되었다가 1956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전통 상설시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무안읍에는 ‘무안시장’이 있었지만, 일로면에 있던 일로시장이 우시장과 함께 개설되었기 때문에 무안 상권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흔히 ‘일로 우시장’이라고 불렸으며, 소뿐만 아니라 염소와 토끼 돼지까지 취급하였습니다. 일로 우시장은 1980년대까지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현재 일로 우시장은 2011년 10월 옛 역전이 있던 자리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가축시장으로 신축하고 이전하였습니다.
일로장이 지방 최초의 장시였음을 주장하는 역사적 기록으로 내세우는 《성종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종실록》 20년(1472년 7월)에는 “고을 길거리에서 장문(場門)이라 일컫고 매월 두 차례씩 여러 사람이 모이는데 물가가 올라서 금지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최초의 향시(鄕市)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종실록》 성종 3년(1472년) 7월 27일(임술) 호조의 계문(상소) 내용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전라도의 고을 길거리에서 ‘장문(場門)’이라 일컫고 매월 두 차례씩 여러 사람이 모이는데, 비록 있는 물건을 가지고 없는 것과 바꾼다고 하나 근본을 버리고 말단(상업)을 좇는 것이며, 또한 물가(物價)가 비싸지게 되므로 이를 금지하였습니다.”
1470년(성종 원년) 무렵 전라도 지역의 흉년을 계기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열기 시작한 ‘장문(場門)’(지방 시장)이 점차 고을 길거리마다 확산되어 매월 두 차례씩 정기적으로 열리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조선 초기 사대부 중심의 억상책(중농억상 정책) 기조에 따라, 호조에서는 이러한 사설 시장이 백성들을 농업(근본)에서 떠나게 하고 상업(말단)에 치우치게 할 뿐만 아니라 물가를 오르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보아 이를 금지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이처럼 초기에는 국가의 통제와 억제 대상이었던 ‘장문’이 지방 백성들의 생존과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점차 뿌리를 내리면서, 오늘날 무안 일로장(남창장)을 비롯한 전국의 전통 5일장 및 지방 상설 시장으로 발전해 나가는 중요한 역사적 과도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록 기록입니다.
《성종실록》 4년(1473년) 2월 11일(임신). 성종의 경연(석강)에서 논의된 내용을 인용하면 “경인년(1470년)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전라도의 백성이 스스로 서로 모여서 시포(市鋪)를 열고, 이를 일컬어 ‘장문(場門)’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기록은 조선시대 초기(성종대) 지방의 공식적인 상설 시장 제도가 정비되기 전, 1470년(경인년) 극심한 흉년을 맞아 전라도 백성들이 살기 위해 자구책으로 자발적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임시 시장인 시포(市鋪)를 열고 이를 장문(場門)이라 불렀던 역사적 배경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장문’의 대표적인 시초 중 한 곳이 바로 무안현의 남창포(남창장, 오늘날의 일로시장) 일대로 전해져 내려오며, 지방 사설 시장의 효시를 이루는 중요한 역사적 단초가 되었습니다.
* 이 자료는 필자의 허락없이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금합니다.
단순한 재인용은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이밖에도 남창장(현 일로장)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 나타나는데,
《만기요람(萬機要覽)》(1808년, 순조 8년)은 서영보, 심상규 등이 재정과 군정에 대해 편찬한 문헌입니다. 〈재용편(財用篇)〉에 무안현 장시 목록이 기록되어 있는데 남창장이 1일과 6일에 열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예규지(倪圭志)〉는 1830년대에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전국 장시의 교역품과 물류 네트워크를 상세히 기록한 백과사전입니다.
여기서 남창장은 남창포(南倉浦) 해수운과 맞물려 곡물(쌀·보리), 수산물(소금, 젓갈, 어류), 농산물이 교환되는 전라남부 남해안-영산강 물류의 주요 교역 거점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근대 시기에는 무안군에서 일로장이 가장 큰 장으로 성장했는데, 장소를 두 번 이동(남창장, 일로 구장터)하여 현재의 장소에 정착하였습니다.
○ 남창장은 지장리 송태마을에 위치해 있었으며, 시기는 조선 전기에서 1940년 무렵까지입니다.
○ 일로 구장터는 월암5리 정미소 부근에 위치했으며, 현 일로시장으로 이전하기까지 20년간을 유지했습니다. 일로역이 개설되면서 일로역 후문과 연결되는 이곳에 장터가 형성되었습니다.
○ 현 일로장터는 1956년에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로시장은 우시장(牛市場)이 커서 신안, 영암, 해남, 나주 등에서도 소를 매매하러 온 사람들과 장을 보러 온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기록으로 그 역사성을 인정받는 일로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장시(場市)로 오늘날에는 5일장으로 1일과 6일에 열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무안군 동네작가 정기성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제작: 무안군동네작가 정기성
일로장의 역사
안녕하세요? 무안군 동네작가 정기성입니다.
오늘은 우리나라 최초의 장으로 알려져 있는 일로장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한국 최초의 장시(場市)가 열렸던 무안군 일로읍은 영산강 고대 포구문화권에 속합니다.
무안 지역은 호남의 젖줄인 영산강의 하류에 속해 있어 농사에 필요한 물과 교역에 필요한 물길이 확보되어 예부터 시장이 발달한 곳이었습니다. 조선시대 전기에 나주와 무안 지방에서 최초로 시장이 개설되었는데, 일반적으로 '남창장'의 전통을 잇고 있는 무안의 일로장이 최초의 지방 장시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안정적인 상권을 형성하던 무안 지역 시장은 일제강점기 목포가 개항하면서 더이상 성장하지 못했고 호남선이 지나는 일로시장을 중심으로 상권이 유지되었습니다. 현재 이곳은 쇠퇴가 진행되고 있는 여느 재래시장과는 달리 아직 명맥을 이어오고 있는데, 소전(가축시장)과 함께 이 지역 시장을 대표합니다.
규모가 컸던 남창장터에는 장날마다 인근의 각설이패들이 몰려들어 구경거리를 선사했으며, 일로장이 구장터로 이전한 이후로는 의산리에 소재한 ‘천사촌’에 거주하던 작은이패들이 일로장에서 동냥을 하면서 각설이타령을 불렀습니다. 당시 일로시장은 남도에서 제법 규모가 컸으므로 철로가 생기면서 각지의 각설이패들이 모여들어 들었습니다. 그래서 일로장을 연상하면 각설이품바가 떠오르기 마련입니다. 더욱이 고 김시라가 일로 천사촌을 배경으로 ‘품바’ 연극을 만들어 선풍적인 인기를 끌면서 일로장은 각설이품바의 발상지로 인식되기 시작했습니다.
남창장은 조선시대 최초로 개설된 시장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무안에서 조선시대 최초의 시장이 개설된 것은 당시 전라도 관찰사였던 고재필에 의해서였습니다. 고재필은 1470년 큰 흉년으로 백성들이 굶주리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물품을 교환할 수 있는 시장 개설하였고, 이것이 조선시대 최초의 시장이 된 것입니다. 이때만 해도 오일장은 아니었고, 한 달에 한두 번 장이 열리는 정도였습니다.
그러다가 남창장이 오일장의 형태를 띠기 시작한 것은 조선시대 편찬된 《동국문헌비고》(1770)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동국문헌비고》 〈시적고〉의 향시(鄕市) 목록 중 전라도 무안현 조에는 당시 개설되었던 4곳의 정기시장이 장날 주기와 함께 기록되어 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남창장은 매월 1일과 6일 장이 섰다.”고 되어 있어 1770년대에 오늘날과 같은 오일장이 열렸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94년에 남창장이 개설되었던 ‘안노(安老)’가 일로면[현재의 일로읍]으로 바뀌면서 남창장을 ‘일로장’이라고 부르게 되었습니다. 일로장은 일제강점기 일로역 후문에 개설되었다가 1956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면서 전통 상설시장이 되었습니다.
당시 무안읍에는 ‘무안시장’이 있었지만, 일로면에 있던 일로시장이 우시장과 함께 개설되었기 때문에 무안 상권의 중심지가 되었습니다. 흔히 ‘일로 우시장’이라고 불렸으며, 소뿐만 아니라 염소와 토끼 돼지까지 취급하였습니다. 일로 우시장은 1980년대까지 크게 번성하였습니다. 현재 일로 우시장은 2011년 10월 옛 역전이 있던 자리에 현대식 시설을 갖춘 가축시장으로 신축하고 이전하였습니다.
일로장이 지방 최초의 장시였음을 주장하는 역사적 기록으로 내세우는 《성종실록》의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성종실록》 20년(1472년 7월)에는 “고을 길거리에서 장문(場門)이라 일컫고 매월 두 차례씩 여러 사람이 모이는데 물가가 올라서 금지시켰다.”는 기록으로 보아 최초의 향시(鄕市)였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종실록》 성종 3년(1472년) 7월 27일(임술) 호조의 계문(상소) 내용에 수록되어 있습니다.
호조에서 아뢰기를, “전라도의 고을 길거리에서 ‘장문(場門)’이라 일컫고 매월 두 차례씩 여러 사람이 모이는데, 비록 있는 물건을 가지고 없는 것과 바꾼다고 하나 근본을 버리고 말단(상업)을 좇는 것이며, 또한 물가(物價)가 비싸지게 되므로 이를 금지하였습니다.”
1470년(성종 원년) 무렵 전라도 지역의 흉년을 계기로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열기 시작한 ‘장문(場門)’(지방 시장)이 점차 고을 길거리마다 확산되어 매월 두 차례씩 정기적으로 열리는 양상을 보였습니다. 이에 조정에서는 조선 초기 사대부 중심의 억상책(중농억상 정책) 기조에 따라, 호조에서는 이러한 사설 시장이 백성들을 농업(근본)에서 떠나게 하고 상업(말단)에 치우치게 할 뿐만 아니라 물가를 오르게 하는 원인이 된다고 보아 이를 금지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이처럼 초기에는 국가의 통제와 억제 대상이었던 ‘장문’이 지방 백성들의 생존과 경제적 필요성에 의해 점차 뿌리를 내리면서, 오늘날 무안 일로장(남창장)을 비롯한 전국의 전통 5일장 및 지방 상설 시장으로 발전해 나가는 중요한 역사적 과도기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실록 기록입니다.
《성종실록》 4년(1473년) 2월 11일(임신). 성종의 경연(석강)에서 논의된 내용을 인용하면 “경인년(1470년)에 흉년이 들었을 때에 전라도의 백성이 스스로 서로 모여서 시포(市鋪)를 열고, 이를 일컬어 ‘장문(場門)’이라 하였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이 기록은 조선시대 초기(성종대) 지방의 공식적인 상설 시장 제도가 정비되기 전, 1470년(경인년) 극심한 흉년을 맞아 전라도 백성들이 살기 위해 자구책으로 자발적으로 물건을 사고파는 임시 시장인 시포(市鋪)를 열고 이를 장문(場門)이라 불렀던 역사적 배경을 생생하게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 ‘장문’의 대표적인 시초 중 한 곳이 바로 무안현의 남창포(남창장, 오늘날의 일로시장) 일대로 전해져 내려오며, 지방 사설 시장의 효시를 이루는 중요한 역사적 단초가 되었습니다.
* 이 자료는 필자의 허락없이 상업적으로 활용하는 것을 금합니다.
단순한 재인용은 반드시 출처를 밝혀주시기 바랍니다.
이밖에도 남창장(현 일로장)에 대한 기록은 여러 곳에 나타나는데,
《만기요람(萬機要覽)》(1808년, 순조 8년)은 서영보, 심상규 등이 재정과 군정에 대해 편찬한 문헌입니다. 〈재용편(財用篇)〉에 무안현 장시 목록이 기록되어 있는데 남창장이 1일과 6일에 열린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임원경제지(林園經濟志)》 〈예규지(倪圭志)〉는 1830년대에 조선 후기 실학자 서유구가 전국 장시의 교역품과 물류 네트워크를 상세히 기록한 백과사전입니다.
여기서 남창장은 남창포(南倉浦) 해수운과 맞물려 곡물(쌀·보리), 수산물(소금, 젓갈, 어류), 농산물이 교환되는 전라남부 남해안-영산강 물류의 주요 교역 거점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근대 시기에는 무안군에서 일로장이 가장 큰 장으로 성장했는데, 장소를 두 번 이동(남창장, 일로 구장터)하여 현재의 장소에 정착하였습니다.
○ 남창장은 지장리 송태마을에 위치해 있었으며, 시기는 조선 전기에서 1940년 무렵까지입니다.
○ 일로 구장터는 월암5리 정미소 부근에 위치했으며, 현 일로시장으로 이전하기까지 20년간을 유지했습니다. 일로역이 개설되면서 일로역 후문과 연결되는 이곳에 장터가 형성되었습니다.
○ 현 일로장터는 1956년에 이전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습니다.
일로시장은 우시장(牛市場)이 커서 신안, 영암, 해남, 나주 등에서도 소를 매매하러 온 사람들과 장을 보러 온 사람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었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기록으로 그 역사성을 인정받는 일로장은 우리나라 최초의 장시(場市)로 오늘날에는 5일장으로 1일과 6일에 열리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무안군 동네작가 정기성이었습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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