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6년 출생, 100세 화가 신금례 상수전 #신금례화가 #꽃의화가신금례 #안혜리 #연영애 #박용인 #상형전 #이화여대서양화과 #한국여류화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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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년 출생, 100세 화가 신금례 상수전 #신금례화가 #꽃의화가신금례 #안혜리 #연영애 #박용인 #상형전 #이화여대서양화과 #한국여류화가협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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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서양화가 신금례 활동의 의미 / 조은정(미술사학자, 미술평론가)
서양화가 신금례는 1926년생이다. 올해가 2026년이니 100년을 살았다.
예전부터 100세가 된 노인에게 나라에서는 명아주 풀로 만든 단단한 지팡이인 청려장을 선물했고 잔치를 열었다.
100년을 산다는 것은 타고난 건강도 있겠지만 자신을 잘 보살피고 다스리는 힘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기에 장한 한 인간에 대해 예의를 표한 것이다.
작가 신금례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부드러운 미소가 한 번도 거두어지지 않은 얼굴과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의 태도가 바로 그 힘이었음을 의심치 않게 된다.
그의 풍모를 통해서만은 한국 근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그가 있었다고 믿어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단지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에서 미술교육을 시작한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1949년에 최초로 졸업한 이들 중 하나라는 말만으로는 수식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환기미술관에서의 개인전 〈화우〉(2020.06.08~08.02)에서는 “1949년 졸업 이후 교육자로서, 한국여성화가들의 목소리를 모으고 이끈 리더로서 한국화단의 산중의 여정을 걸어온 신금례”로 정의되고 있다.
그는 회화를 전공한 여성이 ‘규수화가’로 지칭되던 시대를 살아냈다. 하지만 일찍이 드물게 실력을 인정받은 여성화가 중 한 명이었다.
이화여대 미대 졸업생들의 그룹이자 작품전인 녹미회는 신금례에게도 활동 무대였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3·1절을 기념한 한국미술협회 전시회를 본 원조기구 운크라에서 작품 구입을 결정한 49점 가운데는 신금례의 〈여가〉가 있었다.
당시 기성화단의 유명작가들의 작품이 대부분이었으며 여성화가는 이현숙, 천경자, 신금례에 불과하였으니 같은 여성화가인 신금례의 작품이 해외의 원조로 구입되었다는 사실은 미술계의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그는 휴전 후 제3회 국전에서 〈이인좌상〉으로 입선하는 등 화단의 중심에서 활동하는 화가의 입지를 굳혔다. 사실 개인적으로 가정생활을 이끌고 고군분투한 그의 지나온 삶은 그 시대 여성들의 고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결코 한 번도 화가의 길을 포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꿈을 잃은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 모든 여성화가들의 귀감이 될 일이다.
한국여류화가회 회장으로 있을 때는 ‘가정을 가지면 화업을 포기하거나 중단하는 여성이 많던 때에 자극을 주고 발표의 기회를 마련하여 줌으로써 자기 세계를 갖게 하자는’ 데 있는 목적의 실현을 위한 정기적인 회원전, 국제교류전뿐만 아니라 당시 국가의 복지가 없던 시절 원폭피해자를 돕기 위한 전시를 주관하기도 하였고, 여성미술인의 단합을 공고히 하는 한국여류조각가협회와 공동전시도 추진하였다.
1983년에는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는데 한국미협에서 여성화가에게 중직이 맡겨진 최초의 예였다. 그는 화단에서 주어진 여성미술인의 역할을 최대한 확장한 작가였던 것이다.
1972년 조선화랑 개관기념전인 《여류화가 초대전》이 끝나기도 전에 《신문회관》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때 그는 홍익공전의 교수이자 녹미회 회장이었으며, 이화여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직후였다.
'해바라기', '팬지' 등 그가 그리던 꽃은 이화여대의 신형구 등에게서 교육받은 대상을 재현하는 구상에서 나아가 남관미술연구소와 박석호 화실을 다니며 공감한 감정으로 해석된 대상의 표현이었다.
그의 작품은 구체적인 대상을 지칭하고 있지만 당대 추상화나 구상화와 거리가 있는 것은 단단한 구상에서 시작하여 내적 성찰을 작품에 투사하는 훈련과 자기수양으로서의 제작 태도가 반영된 때문이다.
작품에 대한 태도, 그것이 신금례 작품을 이해하는 통로이다. 그는 구상에서 시작하여 구상을 견지하였다. 한국여류화가회 창립회원이자 주요 활동가였으며 구상을 포기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구상화는 한국미술사 속 구상화와는 다른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상태를 드러내는 도구로서 형태를 사용한 것이라는 점이다.
자신을 둘러싼 사물들 속에서 형태를 찾아 그려내는 방식은 구상화에서 구상적 형상을 해체해 가면서도 대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색채를 통하여 부여된 분위기는 자신의 감상을 화면에 내려놓는 방식이었다.
이후 물감을 두텁게 바르고 나이프로 긁어내는 등 그의 제스처가 화면에 투사된 작품들은 보다 자유로이 대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이르렀다.
이후 그는 산을 많이 그렸는데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 그렇기 때문에 저는 자연을 기초로 그림을 그립니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자연의 대명사로서 산을 만났기 때문이다.
신금례는 꽃의 화가로도 불린다.
화단에서 흔히 꽃그림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폄훼의 의미가 적용된 것은 아니다. 그의 꽃은 야생화를 즐겨 그리게 된 것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자연의 상태를 주시하는 관조와 같은 것이다.
그에게 있어 자연은 생래의 질서, 우주 만물의 생성원리이다.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로 점철된 모더니즘의 시대를 관통한 장한 꽃과 산 그림 아래서 현대 서양화가 신금례가 100년을 살아낸 힘을 다시 본다.
*신금례 상수전 팜플렛 발췌
서양화가 신금례는 1926년생이다. 올해가 2026년이니 100년을 살았다.
예전부터 100세가 된 노인에게 나라에서는 명아주 풀로 만든 단단한 지팡이인 청려장을 선물했고 잔치를 열었다.
100년을 산다는 것은 타고난 건강도 있겠지만 자신을 잘 보살피고 다스리는 힘이 있어야만 가능할 것이기에 장한 한 인간에 대해 예의를 표한 것이다.
작가 신금례를 만나본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부드러운 미소가 한 번도 거두어지지 않은 얼굴과 허리를 꼿꼿이 세운 그의 태도가 바로 그 힘이었음을 의심치 않게 된다.
그의 풍모를 통해서만은 한국 근현대사의 소용돌이 속에 그가 있었다고 믿어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그는 단지 우리나라 최초로 대학에서 미술교육을 시작한 이화여대에서 미술을 전공하고 1949년에 최초로 졸업한 이들 중 하나라는 말만으로는 수식할 수 없는 삶을 살았다.
환기미술관에서의 개인전 〈화우〉(2020.06.08~08.02)에서는 “1949년 졸업 이후 교육자로서, 한국여성화가들의 목소리를 모으고 이끈 리더로서 한국화단의 산중의 여정을 걸어온 신금례”로 정의되고 있다.
그는 회화를 전공한 여성이 ‘규수화가’로 지칭되던 시대를 살아냈다. 하지만 일찍이 드물게 실력을 인정받은 여성화가 중 한 명이었다.
이화여대 미대 졸업생들의 그룹이자 작품전인 녹미회는 신금례에게도 활동 무대였다.
전쟁이 한창이던 1952년 3·1절을 기념한 한국미술협회 전시회를 본 원조기구 운크라에서 작품 구입을 결정한 49점 가운데는 신금례의 〈여가〉가 있었다.
당시 기성화단의 유명작가들의 작품이 대부분이었으며 여성화가는 이현숙, 천경자, 신금례에 불과하였으니 같은 여성화가인 신금례의 작품이 해외의 원조로 구입되었다는 사실은 미술계의 사건이라면 사건이었다.
그는 휴전 후 제3회 국전에서 〈이인좌상〉으로 입선하는 등 화단의 중심에서 활동하는 화가의 입지를 굳혔다. 사실 개인적으로 가정생활을 이끌고 고군분투한 그의 지나온 삶은 그 시대 여성들의 고민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지만, 결코 한 번도 화가의 길을 포기한 적이 없다는 사실은 꿈을 잃은 적이 없다는 의미에서 모든 여성화가들의 귀감이 될 일이다.
한국여류화가회 회장으로 있을 때는 ‘가정을 가지면 화업을 포기하거나 중단하는 여성이 많던 때에 자극을 주고 발표의 기회를 마련하여 줌으로써 자기 세계를 갖게 하자는’ 데 있는 목적의 실현을 위한 정기적인 회원전, 국제교류전뿐만 아니라 당시 국가의 복지가 없던 시절 원폭피해자를 돕기 위한 전시를 주관하기도 하였고, 여성미술인의 단합을 공고히 하는 한국여류조각가협회와 공동전시도 추진하였다.
1983년에는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으로 선출되었는데 한국미협에서 여성화가에게 중직이 맡겨진 최초의 예였다. 그는 화단에서 주어진 여성미술인의 역할을 최대한 확장한 작가였던 것이다.
1972년 조선화랑 개관기념전인 《여류화가 초대전》이 끝나기도 전에 《신문회관》에서 최초의 개인전을 열었다.
이때 그는 홍익공전의 교수이자 녹미회 회장이었으며, 이화여대 교육대학원을 졸업한 직후였다.
'해바라기', '팬지' 등 그가 그리던 꽃은 이화여대의 신형구 등에게서 교육받은 대상을 재현하는 구상에서 나아가 남관미술연구소와 박석호 화실을 다니며 공감한 감정으로 해석된 대상의 표현이었다.
그의 작품은 구체적인 대상을 지칭하고 있지만 당대 추상화나 구상화와 거리가 있는 것은 단단한 구상에서 시작하여 내적 성찰을 작품에 투사하는 훈련과 자기수양으로서의 제작 태도가 반영된 때문이다.
작품에 대한 태도, 그것이 신금례 작품을 이해하는 통로이다. 그는 구상에서 시작하여 구상을 견지하였다. 한국여류화가회 창립회원이자 주요 활동가였으며 구상을 포기한 적이 없다.
하지만 그의 구상화는 한국미술사 속 구상화와는 다른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그의 상태를 드러내는 도구로서 형태를 사용한 것이라는 점이다.
자신을 둘러싼 사물들 속에서 형태를 찾아 그려내는 방식은 구상화에서 구상적 형상을 해체해 가면서도 대상을 포기하지 않았다.
색채를 통하여 부여된 분위기는 자신의 감상을 화면에 내려놓는 방식이었다.
이후 물감을 두텁게 바르고 나이프로 긁어내는 등 그의 제스처가 화면에 투사된 작품들은 보다 자유로이 대상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는 데 이르렀다.
이후 그는 산을 많이 그렸는데 “인간은 자연에서 태어나서 자연으로 돌아갑니다. … 그렇기 때문에 저는 자연을 기초로 그림을 그립니다.”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모든 자연의 대명사로서 산을 만났기 때문이다.
신금례는 꽃의 화가로도 불린다.
화단에서 흔히 꽃그림이라는 말이 갖고 있는 폄훼의 의미가 적용된 것은 아니다. 그의 꽃은 야생화를 즐겨 그리게 된 것에서 드러나는 것처럼 자연의 상태를 주시하는 관조와 같은 것이다.
그에게 있어 자연은 생래의 질서, 우주 만물의 생성원리이다.
현학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로 점철된 모더니즘의 시대를 관통한 장한 꽃과 산 그림 아래서 현대 서양화가 신금례가 100년을 살아낸 힘을 다시 본다.
*신금례 상수전 팜플렛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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